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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특강] 『21세기에 다시 보는 한국근현대사』 허동현 교수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14.01.27 18:09
조회수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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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허 동현 경희대학교 한국현대사연구원 원장

방송 일정

 

[TV] 매주 목요일 밤 2315(본)

     매주 금요일 낮 12시 15분 (재)

[PLUS2] 매주 일요일 낮1030()  

 

강의 미리보기   

 

 

21세기에 다시 보는 한국근현대사 Ⅰ

 

<동아시아 국제 정세 변화와 한반도의 위기>

18세기 중엽, 동아시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동아시아의 시장을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와 일본, 조선 동아시아 3국은 서구 세력의 등장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가장 먼저 변화를 보인 곳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에 의해 개항하고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후 서구 근대 문물에 충격을 받고 적극적으로 이를 수용하게 된다. 그 결과 일어난 일이 바로 1867년의 메이지 유신이다. 이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를 세우는 것으로, 지방분권체제인 막부체제를 마감하고, 서구의 근대적인 문물은 물론 제도까지 도입하는 움직임이었다.

청나라 역시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피해갈 수 없었다.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의 결과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기존의 중화주의에서 벗어나 중국의 정신은 지키되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양무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하지만 조선은 아직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흥선대원군이 정국을 주도했던 조선은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쳤으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연이은 서구 세력의 침입은 조선의 빗장을 더욱 굳게 닫게 만들었다.

하지만 요지부동인 조선의 내부와는 달리 조선 밖의 국제 정세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동아시아 지역을 눈여겨 본 나라 중 하나는 러시아였다. 부동항이 필요했던 러시아는 베이징 조약을 중재한 대가로 연해주를 할양받았고, 이는 만주 지역에 이권이 걸려있던 모든 열강 - 영국, 중국, 프랑스, 미국 등 - 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연해주와 접해있는 조선의 지정학정 위치가 중요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의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 조선을 청나라의 영향권에서 빼 내 자신의 대륙 침략 기지로 삼기 위한 야욕을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에서도 개혁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에 수신사를 보내고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식군대와 신식군대의 차별에 반발해 일어난 임오군란은, 흥선대원군을 복권시켜 역사의 흐름을 다시 과거로 되돌렸고, 개화파들이 추진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지배층의 무능력은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졌고, 이는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청나라와 일본에게, 조선에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되어버렸다. 마침내 청나라와 한 판 대결에 나선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조선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한 데 이어 러일전쟁에서도 승전하며 마침내 한반도를 식민지로 거느리게 된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맺으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이 비참한 역사의 가장 큰 원인은 스스로의 힘을 키우지 못하고 주변 강대국들의 힘에 기대려했던 지배층의 무능력이었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한반도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일본과 중국, 러시아,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의 운명은 이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100여 년 전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며, 우리가 그때 겪은 실패의 원인은 무엇이었으며, 오늘날 국제 정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일제식민통치와 독립운동>

 

1910년, 한반도에 치욕과 통한의 역사가 새겨졌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됐다. 이로써 한반도는 주권을 잃고 반만년 역사 처음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조선을 삼킨 일본은 무자비한 착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헌병의 무단통치가 이뤄졌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토지를 수탈했으며 조선태형령을 실시해 조선인의 인권을 짓밟았다.


일본의 무자비한 폭압은 결국 참고 참았던 한민족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1919년 3월 1일, 지식인부터 하층민까지 전국민이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3.1운동은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지만 중요한 결실을 맺었다. 하나는 일본이 무단통치 대신 문화정치를 실시해 겉보기로나마 유화적인 정책을 펼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것이다.

 

1919년 4월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해 모든 인민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공화제를 표방했다. 100여 년 전, 대한민국의 독립투사들은 이미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를 꿈꾸었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당면한 목표는 당연히 조국의 독립이었다. 이승만은 열강의 힘을 빌리는 외교독립론을 펼쳤고, 안창호는 독립을 위한 최소한의 무력을 준비해야 한다는 독립전쟁준비론을 주장했다. 한편 만주에서는 무장독립단체들이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립은 요원했다. 열강들의 철저한 무시와 외면으로 외교독립론은 한계에 부딪혔고, 만주의 독립군은 일본의 토벌작전에 밀려 연해주로 후퇴했다가 지도부의 분열이 계기가 된 자유시 참변으로 궤멸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독립을 향한 민족의 열망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신채호에 의해 의사와 열사의 희생에 의한 독립을 꾀하는 의열투쟁이 제기되었고 김구가 이에 호응했다. 나석주와 윤봉길 등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단원들이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며 꽃같은 젊음을 내던졌다.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가 도를 더해갔다. 일본은 조선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과 자원을 구하는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내선일체를 외치며 창씨개명을 단행했고 조선의 말과 글을 빼앗았다. 특히 1942년 미드웨이 해전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조선의 학생들을 강제징집해 전선으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일본의 발악에도 불구하고 패망의 그림자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1945년 8월, 두 개의 원자폭탄이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팻맨(fat man)과 리틀보이(little boy)는 결사항전을 외쳤던 일본의 야욕을 꺾기에 충분했고, 마침내 8월 15일 일본의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마침내 찾아온 광복. 하지만 우리 민족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연합국 측에 참전하기로 했던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작전에 전격 투입되기 직전에 일본이 항복했기에 전승국의 지위를 누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해방은 우리 힘이 아닌 다른 이들의 힘으로 얻어졌고,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혹독한 강압 통치 속에서도 35년간 끈질기게 싸우며 독립을 염원했던 한민족. 하지만 그 피와 땀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우리의 독립운동이 가진 한계와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 무엇 때문에 우리는 우리 힘으로 독립을 얻지 못했던 걸까. 일제강점기 하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살펴보며, 혹시 오늘날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본다.

 

 


<광복, 분단, 대한민국 건국>

 

1945년 8월, little boy와 fat man이 일본 제국주의를 침몰시켰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두 발의 원자폭탄은 일본 군국주의의 마지막 광기를 잠재웠고, 결국 일왕 히로히토는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일본의 항복과 함께 한반도는 35년 만에 광복을 되찾았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이 아닌 다른 나라의 힘으로 얻은 것이기에 해방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세계 질서는 영국과 독일, 프랑스 등의 기존 열강은 몰락하고 대신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소련 두 세력이 대립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동북아시아에서 두 세력의 대립은 불행히도 한반도를 무대로 삼게 되었다.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패전국 일본을 분할하는 대신 한반도를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 분할점령할 것을 제의했다. 소련은 향후 한반도 북쪽과 일본 홋카이도를 교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이를 수용한다. 우리 민족을 지금까지 갈라놓게 된 38선은 바로 이때 두 강대국의 편의에 의해 생기게 된 것이다.

 

민족의 독립과 민주국가 수립을 염원하고 있던 한민족의 분노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통과되자 거센 반탁 운동으로 터져나오게 된다. 남한의 김구와 이승만은 초반에는 함께 반소, 반탁, 반공 운동을 전개했지만 1946년 6월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노선을 바꾼다. 당시 동부유럽 국가들이 소련의 위성국이 되어가는 국제 정세를 보며 남한에만이라도 자유민주정부가 들어서야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김구의 생각은 달랐다. 김구는 남북한의 통일만이 민족의 살 길이라고 믿었으며 이에 따라 1948년 4월 통일정부를 구상하기 위해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한다. 하지만 너무 늦은 결정이었다. 남한에서는 5.10 총선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북한의 김일성 역시 단독 정부 수립을 이미 결정한 상태였다. 김구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결국 1948년 8월 남한에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이, 북한에는 한 달 뒤인 9월 김일성을 주석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들어선다.

 

한 국토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누가 한반도의 정통성을 잇는 정부인가를 따지는 인정투쟁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이를 위해 1948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UN 3차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승인을 받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이 중 주목할 것은 당시 UN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바티칸의 지원을 얻기 위해 가톨릭 신도이자 외교통이었던 장면을 한국대표단 수석대표이자 바티칸 대통령 특사로 임명했다는 점이다. 장면은 이승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바티칸을 찾아 교황 비오 12세의 지원을 얻어낸 것은 물론, 당시 대한민국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영연방 국가들과 이슬람 국가의 대표들을 상대로 부단한 설득작업을 펼친다.

 

한국대표단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마침내 UN 3차 총회 회기 마지막 날이었던 1948년 12월 12일 UN은 대한민국 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한다.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자력으로 독립을 얻지 못했기에 겪어야 했던 분단의 아픔과 민족의 분열, 그 과정에서 벌어진 곳곳의 유혈사태는 여전히 우리 근현대사의 상처로 남아 있다.

 

광복부터 분단,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며, 우리가 오늘날 이 시기로부터 얻어야 하는 교훈과 깨달음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다시 보는 6.25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일요일 아침의 평화롭고 느긋한 공기는 멀리서 들려오는 몇 발의 포성에 찢겨나갔다. 

 

6.25전쟁은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됐다. 북한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였던 남한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긴데 이어 3개월 후에는 경상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한반도 전역이 북한의 점령 하에 들어가게 됐다. 

 

북한의 도발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신속했다. 미국은 6.25가 일어나자마자 UN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했고 6월 27일에는 UN군 파병을 결정했다. UN군을 이끌게 된 미국은 낙동강 전선에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기로 했다. 영덕부터 진주까지 이어지는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미군은 ‘죽음으로 사수하라’는 사수훈령을 내렸고, 낙동강 유역에서는 말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마침내 방어선 사수에 성공하면서 UN군과 한국군은 한숨 돌릴 틈을 얻었으며, 9월 15일 북한군의 허리를 자르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불리했던 전황을 공세로 돌리게 된다. 9월 28일 UN군은 서울을 수복했으며 북진을 계속해 10월 하순에는 압록강 유역까지 도달한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의 변수가 생긴다. UN군의 파죽지세에 위협을 느낀 중국이 참전을 결정한 것이다. 중국의 개입으로 UN군은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고, 38선을 경계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휴전 논의가 시작되었다. 특히 1953년에는 국제 정세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북한에 지원을 해 준 스탈린이 사망했고, 미국에서는 조기 종전을 공약으로 내건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휴전제의가 급물살을 타게 된 가운데, 이승만은 휴전에 대해 결사반대를 외치며 반공포로들을 대규모로 석방하는 승부수까지 띄운다. 

 

결국 미국은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끊임없이 요구해왔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며 마침내 6.25전쟁은 마침표를 찍는다. 

 

전쟁은 끝났지만 한반도에는 깊은 상흔이 남았다. 남북 합쳐 200만 명이 넘는 인명이 스러졌고 국토는 피폐화됐으며 남과 북을 둘로 가른 38선은 냉전의 상징이 됐다.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긴 지난 6.25전쟁을 돌아보며,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을 겪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모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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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댓글란이 넘작아서 반대댓글 쓰지도 못하겠네...에혀!ebs님들아 댓글란 용량늘려줘야지...특정역사학자의 말만 듣고있어야됩니까? 독재정권이 일방적으로 얘기했던것처럼?

    EBS 정*주 2014.02.21 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