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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특강]『우리가 기억해야 할 조선 전쟁사』노영구 교수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14.01.20 15:38
조회수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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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사 : 

노 영구 국방대학교 군사전략학부 교수

방송 일정

2014 1월 23일 목요일 밤 11시 15분 

 

[TV] 매주 목요일 밤 2315(본)

     매주 금요일 낮 12시 15분 (재)

[PLUS2] 매주 일요일 낮1030()  

 

강의 미리보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조선 전쟁사 Ⅰ

<세종, 북방을 개척하다>


세종대왕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이미지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군이라는 것이다. 이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나 해시계를 제작하는 등 백성을 돌보는 정책을 펼치고 수많은 문화업적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세종 시대에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가 있다. 바로 북방 개척에 대한 것이다.


세종대왕이 즉위하던 15세기 초엽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국제 정세가 몹시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14세기 후반,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만주 지역에 세력 개편이 일어났다. 조선과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족 사이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친(親)여진족 세력이었던 태조 이성계가 태종 이방원에게 밀려나면서 조선과 여진족이 긴장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이다. 명나라와 만주 이민족 간의 갈등, 만주 지역의 여러 이민족들 간의 갈등, 조선과 여진족과의 갈등, 이처럼 여러 민족의 갈등과 이익다툼이 중첩되어, 동북아시아 일대가 혼란과 긴장에 놓여있던 시기에 세종은 왕에 즉위했다.


이런 상황에서 1432년에 일어난 여진족의 조선 국경 침입은 조선이 여진족을 정벌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한다. 당시 여진족 이만주가 조선의 영토인 여연을 침공해 수 십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잡아간 것이다. 이에 세종은 북방의 여진족 세력을 정벌하고 북방에서의 조선의 영향력을 강화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고, 이 문제를 두고 조정에서는 수 십 차례의 회의가 열렸다.


조선이 직면한 첫 번째 문제는 여진족이 거주하는 지역이 사실상 명나라의 영향권 내에 있기 때문에 자칫 명나라와의 관계가 곤란해질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조정 내부에서 굳이 대규모 원정으로 여진족을 건드려 성가신 일을 벌일 필요가 있냐는 반론에 부딪혔다. 마지막 문제는,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북방 지역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여기에 대한 세종의 입장은 강경하되,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는 열려 있었다. 세종은 조선의 강토를 지키기 위해 북방 정벌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벌의 이유와 목적, 그리고 방법에 대해서는 수십 차례의 회의와 토론을 통해 조정의 뜻을 하나로 모아갔다.


이 결과, 초반에는 정벌에 반대했던 최윤덕이 평안도 병마절제사로 파견돼 전쟁의 전권을 맡게 되었으며, 여진족을 방심하게 하기 위한 다양한 기만술, 그리고 이들을 고립시키기 위한 외교술이 동원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1차 정벌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조선군은 여진족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7군데를 동시에 공격해 여진족에게 반격할 여지를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퇴로까지 막아버렸다. 결국 여진족의 이만주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퇴각했고 조선은 여진족을 성공적으로 토벌할 수 있었다.


세종은 이 기세를 몰아 2차 정벌작전을 벌인다. 2차전은 군사적으로는 1차 정벌작전만큼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더 이상 여진족이 북방에서 위력을 떨칠 수 없게 만듦으로써 정치적으로는 성과를 거둔다. 2차에 걸친 북방 정벌작전으로, 조선은 4군6진을 세워 북방의 영토를 굳건하게 지킬 수 있게 된다.


세종의 북방 정책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국의 이익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자주성이고, 다른 하나는 중요한 정책 결정에 앞서 다양한 의견을 충분히 듣고 토론을 통해 결론을 이끌어낸 민주성이다.


조선의 영토를 넓혔다고만 알고 있는 ‘4군6진’이 가지고 있는 진짜 중요한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성공적인 리더십이란 어떤 것인지, 세종의 북방 정책을 통해 알아본다. 


 

 

강사 : 

노 영구 국방대학교 군사전략학부 교수

방송 일정

2014 1월 23일 목요일 24시 05분 

 

[TV] 매주 목요일 밤 2315(본)

     매주 금요일 낮 12시 15분 (재)

[PLUS2] 매주 일요일 낮1030()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전쟁사 Ⅱ

<임진왜란의 분수령, 벽제관 전투>


무려 7년 동안 조선의 영토와 백성들을 할퀴었던 임진왜란.

그런데 이 임진왜란은 1년 만에 끝날 수도 있었던 전쟁이었다.


금방 종결할 수 있었던 전쟁을 왜 7년 동안 질질 끌어야 했던 걸까? 그 답은 임진왜란이 발발됐던 이듬해 1593년 1월에 벌어졌던 ‘벽제관 전투’에 담겨 있다.


1592년 4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올라와 침공한지 한 달 만인 5월에는 한양을, 6월에는 평양성을 함락시킨다. 일본군의 조선 침략에 명나라 역시 골머리를 앓게 됐다. 일본군이 조선을 점령하게 되면 그 다음 침공 차례는 당연히 명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명나라는 ‘순망치한’의 논리로 조선에 원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조선에 파병된 조승훈의 원군은 생각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일본의 조총 공격과 근접전 능력에 밀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명나라는 이번에는 이여송을 조선 파견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2차 원군을 파병한다. 이여송이 거느린 군대는 남병과 북병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이 중 눈여겨 봐야할 것은 바로 남병이다. 남병은 다양한 화기와 검술에 능한 신식 군대였는데 이들의 능력은 1593년 1월에 벌어진 평양성 전쟁에서 두드러진다. 먼저 불랑기포나 화전 등의 강력한 화기로 일본군의 조총을 무력화시켰고,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되는 진형이 일본군을 일대 혼란으로 빠뜨린다. 신식 전술을 활용한 명나라 군대에 힘입어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을 패퇴시키고 평양성을 탈환한다. 이 기세를 몰아 한양 탈환까지 나선 조·명 연합군과, 명나라 군대의 진격을 막기 위해 나선 일본군이 다시 맞붙은 곳이 바로 오늘날의 고양시인 벽제관이다.


하지만 명나라는 평양성 전투에서만큼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벽제관은 지형이 길고 좁은데다 시기적으로 얼었던 땅이 녹아 질척거리는 때였던 만큼 명나라 군대의 기동성이 발휘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평양성 전투에서의 승리에 자신감이 고조된 명나라는 단숨에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신중함을 잃었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의 기만술에 걸려들어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간신히 남은 병력을 철수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벽제관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이 패하면서, 일본은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의 전투는 세 나라간의 지루한 외교전과 국지전으로 바뀌었고 전쟁은 장기화되면서 세 나라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을 입힌다.


1593년에 벌어진 평양성 전투와 벽제관 전투는 임진왜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임진왜란은 왜 7년 동안 이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오늘날 우리가 이 두 전투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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