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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특강] 『G2시대에 병자호란을 돌아보다』 한명기 교수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13.10.14 18:15
조회수
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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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한 명기 명지대학교 사학과 교수  

 

방송 일정 :

2013103, 1010, 10일 17일, 10월 24일, 1031, 117 

 

[TV] 매주 목요일 밤 2315(본)

        매주 금요일 낮 12시 15분 (재)

[PLUS2] 매주 일요일 낮1030()  

 

강의 미리보기  

 

G2시대에 병자호란을 돌아보다

- 1왜 병자호란을 기억해야하는가?”  

 

  병자호란은 1636129일에 시작하여 1637130일에 종료된 청의 침략 전쟁이다. 1592년에 경험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이미 쇠퇴한 조선은 병자호란이 시작한 지 두 달여 만에 청에 항복하였다.

  철기(鐵騎)로 무장한 청 아래, 인조는 강화도 대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고 45일 만에 남한산성에서 항복하였다. 삼전도에서 인조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청 태종에게 행했다. 하지만 조선의 치욕은 이것뿐만 아니었다. 백성이 당한 고통은 더욱 처참했다. 당시 청에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만 50만 명에 달한다. 심양에서 조선인 포로들은 노비로 전락하였고 많은 포로들이 탈출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조선이 청에게 항복하는 조건으로 맺은 협약 내용 11가지 조항 중에서 만주 땅을 밟은 포로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만일 도망가더라도 조선에서는 청에 돌려보내야 한다는 내용 때문에 힘들게 고향 땅을 찾은 포로들은 자결하거나 다시 청으로 돌아가는 등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병자호란을 비롯하여, 한반도는 기존 강대국과 부상하는 신흥세력의 패권다툼 사이에서 네 차례 전쟁을 겪어왔다. 홍건적의 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청일전쟁이 그것이다.

  14세기 후반 원명교체로 인한 홍건적의 침입을 겪었고, 16세기 중·후반 명나라를 침략하겠다는 구실로 그 길목에 있는 조선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이후 17세기 초반에 명청교체로 인해 병자호란을 겪었으며,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청나라가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되었다.

  19세기에 들어,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서양의 강국들이 아시아로 진출하였다. 영국과 청나라간의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일본은 이에 힘입어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켰으며, 이 전쟁 또한 조선을 비켜가지는 않았다.

미국과 중국 중심의 현재 시대를 흔히 G2 (Group of 2) 시대라고 말한다. G2세력 영향권에 속해 있는 한반도! 만일 두 강대국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게 된다면,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불어올 폭풍은 자명한 사실이다. 역사상 가장 치명적이었던 전쟁, 병자호란! 역사 속에서 찾는 반면교사, 과거에 경험했던 병자호란의 참상을 되짚어보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G2시대에 병자호란을 돌아보다 

- 2여진족의 성장과 조선의 위기  

  

  발해 멸망 후 고려와 거란에 예속되어 있던 여진족은 아골타를 수장으로 1115년부터 금나라를 세워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234년 몽골, 남송 연합군의 공격으로 건국 120년 만에 멸망하였고 여진족은 또다시 동북지역에서 유목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명나라 초기 여진족은 야인여진, 해서여진, 건주여진 세 부족으로 나뉘어 생활하였는데, 명나라는 과거 금을 세웠던 아골타와 같은 새 지도자가 등장을 우려하여 위소를 설치해 여진족을 견제하였다.

  1583년 건주여진 부족장 왕고가 명나라의 심양을 공격하였고, 그에 따른 명나라는 이성량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왕고(건주여진)는 해서여진으로 도주하였으나, 해서여진은 이성량에게 왕고를 넘겨주어 그는 북경에서 능지처참을 당한다. 왕고의 아들 아타이(건주여진)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해서여진을 공격하였고 다시 파견된 명나라 이성량의 6만의 군대에 밀려 아타이는 고륵채라는 성에 포위당하게 된다. 같은 여진족인 누르하치(건주여진)와 그의 아버지 타쿠시, 그리고 할아버지 교창가는 명나라 이성량에 대한 충성으로, 명나라 편에 참전하였다. 아타이의 아내와 사촌이었던 타쿠시와 교창가는 아타이에 항복을 권유하러 고륵채로 나서지만, 명나라 진영에서 날아온 총을 맞고 타쿠시와 교창가는 사망한다.

  누르하치는 부조피살의 대가로 명으로부터 교역 칙서 30통과 말 30필을 배상금으로 지급받았고 그 칙서를 이용하여 산삼, 모피, 진주의 유통로를 장악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1588년 누르하치는 부를 이용해 군사력을 키워 부조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명나라를 공격 하였다. 누르하치는 압록강까지 계속해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 당시, 일본을 통일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공격해왔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누르하치는 조선이 원하면 임진왜란에 원병 파견을 지원해준다고 제안했지만, 여진족을 오랑캐로 여겼던 조선은 누르하치의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조선은 그 이후 계속해서 누르하치에 대한 압박을 느끼게 된다.

  1608, 왕으로 즉위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남긴 피해 문제와 계속되는 주변국들의 위협 속 과제를 안고 있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만력제가 보내준 원병에 대한 조선의 보은을 원하고 있었고, 누르하치 세력도 계속된 압박을 가하였다. 이러한 계속 된 명과 청(후금)의 위협 속에서 조선은 어떠한 대안과 대책을 가지고 위기에 대처했는지 알아본다.

    

   

G2시대에 병자호란을 돌아보다

- 3후금의 건국과 광해군의 외교정책 

 

  광해군은 조선의 15대 임금으로 선조와 공빈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임시조정인 분조(分朝)를 만들어 광해군에게 조선에 머물도록 지시하였고, 광해군은 민심 수습, 군사 모집 등 적극적인 분조 활동을 하였다. 이후 1608년 광해군은 선조에 뒤를 이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1607년 누르하치는 두만강의 홀온 지역을 정복하면서 계속해서 자신의 세력을 넓혀갔고, 이에 광해군은 누르하치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적국인 일본과의 기유약조를 체결하게 된다.

  또한 광해군은 후금(누르하치)을 상대로 기미책, 자강책, 적군 동향 파악 등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화포 제조법이 담긴 화기도감을 개편하였고, 군사력 보강을 위해 무과 시험을 통한 병력을 충원하는 한편, 군사들의 훈련 상태를 열무제(閱武才), 관무제(觀武才)를 통해 점검하였다. 또한 적군의 동향을 파악하는 한편 조선의 군사 기밀이 유출되지 않게 하는 것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누르하치의 여진족은 팔기제를 정비하여 평소에는 백성을 다스리고 전란시에는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시켰다. 팔기제는 군사력을 높여, 결국 1616년 대금(후금)을 건국하게 된다. 1618, 후금은 7대한을 명분으로 명나라를 침략하고, 이에 명나라는 조선에 군병 지원을 요청한다. 광해군은 명나라 파병이, 후금의 보복공격으로 이어질까 두려워, 명의 원군요청을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조선은 재조지은을 강조하는 신하들과 명나라의 압박으로 인해 결국 1619년 강홍립이 이끄는 115백 명의 원군을 명에 파병하게 된다. 하지만 강홍립이 이끌던 조선의 군대는 심하전투에서 후금에 패배하고 항복한다.

  명나라 또한 누르하치의 세력을 견제하기엔 국력이 많이 부족하였다. 당시 명나라의 13대 왕인 만력제는 국정에 관심이 없었으며, 사리사욕을 챙기기에 급급하였다. 결국 명나라는 두송 장군의 이기심으로 누르하치 군에 대파 당하고, 1625년 후금은 수도를 심양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에 조선의 서인들은 누르하치 군에 패한 광해군과 강홍립에 책임을 물었으며,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쫓고 인조를 왕위에 앉혔다. 명나라는 인조반정을 반정이 아닌 찬탈로 생각했고, 조선은 반정의 정당성을 명나라에 승인 받는 일이 절실했다. 이에 명나라는 후금()을 견제하기 위해 다시 조선에 압박을 가했고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G2시대에 병자호란을 돌아보다 

- 4강 "인조반정과 전란에 휩싸이는 조선" 

 

   인조정권은 광해군에 3가지 명분이라는 이유로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켰다. 결국 광해군은 폐위되고 인조의 측근인 서인들이 조선의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인조는 광해군 대의 정치인들이 해왔던 비리와 만행을 철폐하고 백성들의 민심을 잡기위해 대동법, 호패법을 이용한 개혁정책을 펼쳤다. 정권을 잡은 서인 중 이괄이라는 공신이 있었는데, 논공행상의 문제로 1등 공신의 역할은 했지만, 2등 공신으로 추대되어 인조가 집권한 정권을 상대로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괄의 난은 조선 정부의 진압군에 의해 2달 만에 끝나고 만다.

   이후 후금을 피해 조선으로 도망쳐 온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후금에겐 해군이 없다는 이유로 평안도의 섬인 가도로 들어가면서 명, 청 그리고 조선의 관계를 더욱 고조시키게 된다. 인조는 자신이 정권을 잡은 지 1년이 지났음에도 명나라에 정식으로 승인 받지 못하자, 계속해서 숭명(崇明) 정책을 펼치게 되고 명과 조선의 매개체인 모문룡은 조선의 1년 재원의 1/3을 요구하며, 호의호식(好衣好食)과 권력을 모두 누리게 된다.

   명나라는 누르하치가 선전포고한 이후 계속된 연전연패로 인해 요양, 심양 등 요동지역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1626년 명의 장수 원숭환이 서양에서 들여 온 신식 포인 홍이포를 영원성에 설치하며, 1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온 누르하치의 철기 군을 물리쳐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전투에서 포탄에 타격을 입은 누르하치는 그 후유증으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고,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홍타이지(숭덕제)가 후금의 2대 왕으로 재위한다.

   1627년 광해군에 대한 보복을 빌미로 후금군 3만의 군대가 조선에 침입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난다. 후금의 철기군을 당해낼 수 없던 조선은 강화회담을 성립시켜 후금군을 철수시킨다. 하지만 강화회담으로 인해 정묘약조를 체결하여,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게 된다.

   정묘호란 이후, 10년은 조선에게 정말 중요한 시간이었다.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는 조선은 명과 후금 모두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명과 후금이 서로 계속 싸우는 한, 조선은 필연적으로 둘 중 한 나라를 선택해야하는 기로에 내몰리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계속된 숭명정책으로 청을 인정하지 않은 조선은 1636년 병자호란을 맞게 된다.

  

 

G2시대에 병자호란을 돌아보다

- 5“명·청 교체와 치욕의 병자호란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지속된 명·청 대립 속에서, 둘 중 한 나라를 선택해야하는 기로에 놓여 있었다.

   명나라의 무장 원숭환은 후금에 빼앗긴 만주지역을 다시 수복하려고 했다. 반면 평안도 가도에 머물고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명의 조정으로부터 받은 엄청난 양의 군량을 멋대로 횡령하고, 조선으로부터 부족한 식량을 징수했다. 또한 밀무역과 상인들에게 세금을 받는 등 부정부패와 사리사욕만을 추구하였다. 결국 원숭환은 모문룡을 쌍도로 소환하여 12가지 죄악을 들어 참수하였다.

   한편, 원숭환이 지키는 영원성을 돌파할 수 없었던 후금의 홍타이지는 몽골족의 도움으로 영원성을 거치지 않고 북경으로 진격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인, 만리장성의 쪽문 희봉구를 통해 북경을 기습 공격하였고 영원성의 원숭환은 황성을 지키기 위해 북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북경 광거문에서 홍타이지의 후금을 대파하였다. 하지만 원숭환은 엄당 세력들의 모함, 홍타이지의 반간계, 가도의 모문룡을 멋대로 참수한 이유 등으로 숭정제에게 책형을 당하게 된다.

   계속해서 세력을 넓혀가던 홍타이지는 몽골족에게 원나라의 옥새를 얻고, 대패륵 다이샨과 신하들에게 더 이상 칸이 아닌 청의 황제로 즉위할 것을 제안 받는다. 홍타이지는 1636(인조 14) 2월 용골대를 사신으로 조선에 파견하여 군신의 의()를 맺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도망하여 돌아간다.

   조선은 후금을 정벌해야한다는 척화파의 말에 따라 친명배금 정책을 유지하고, 계속해서 후금을 오랑캐라고 여겼다.

   이에 화가 난 홍타이지는 163612914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병자호란).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한양까지 도착한 후금군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다음과 같은 조약을 맺게 되었다. 

 

첫째, 조선은 청에 대해 신의 예를 행할 것.

둘째, 명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바치고 명과의 교호(交好)를 끊으며 조선이 사용하는 명의 연호를 버릴 것.

셋째,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넷째,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은 기일을 어기지 말고 원군을 파견할 것.

다섯째, 가도를 공취할 때 조선은 배 50척을 보낼 것.

여섯째, 성절(聖節상삭(上朔동지(冬至중궁천추(中宮千秋태자천추·(() 사신의 파견은 명의 구례(舊例)를 따를 것.

일곱째, 압록강을 건너간 뒤 피로인 중에서 도망자는 전송할 것.

여덟째, 내외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아홉째, 조선은 신구(新舊) 성원(城垣)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열번째, 올량합인(兀良合人)은 마땅히 쇄환할 것. 열한번째, 조선은 기묘년(1639)부터 세폐를 보낼 것 등이었다. 

 

   조선은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에도 대외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북벌론을 따르기도 한다. 18세기 중반에야 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 사상이 나타나지만 19세기에 결국, 서양의 침입 전쟁인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게 된다.

   17세기 명과 청의 패권 교체 사이, 혼란에 휩싸인 조선은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참혹한 전쟁을 겪게 된다. 21세기 현재, 세계열강들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과거 명·청시대와 비슷한 구도로 G2(미국, 중국)시대에도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 병자호란을 통해 대한민국은 G2시대에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하는지 알아본다.

 

강의별 부제 

  

1"왜 병자호란을 기억해야 하는가?" 

 

2"여진족의 성장과 조선의 위기" 

  

3"후금의 건국과 광해군의 외교정책" 

 

제 4강 "인조반정과 전란에 휩싸이는 조선" 

 

제 5강  "명·청 교체와 치욕의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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