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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중심의 청년담론에 소외된 지방청년 문제

공감시대 인터뷰

| 2018. 08. 22

*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EBS FM 공감시대'를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EBS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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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EBS 라디오 FM 104.5 (18:00 - 20:00)
■ 진행 : 최영일 앵커
■ 대담 : "수도권 중심의 청년담론에 소외된 지방청년 문제"(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수요 초대석, 함께 하겠습니다. 많은 언론들이 다루고 있는 이슈가 있습니다. 바로 청년 문제죠. 최근 청년 실업률부터 벌써 오래된 담론인 N포 세대, 또 88만 원 세대 이런 책도 나왔었어요. 하지만 쏟아지는 청년담론들이 대부분 서울 청년을 기준으로 하지 지방대생은 소수자다, 이런 신선한 지적이 나왔습니다. 지난여름에 발표된 ‘복학왕의 사회학’. 논문입니다. 청년담론에서 소외된 지방대생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언론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학계를 뜨겁게 달군 이 논문의 저자를 스튜디오에 직접 모셨습니다. 계명대학교 사회학과의 최종렬 교수님을 모시고 관련 이야기를 한 번 자세히 파보도록 하겠습니다. 최 교수님, 어서 오세요.

최종렬> 네, 안녕하세요.

최영일> 멀리서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종렬> 감사합니다.

최영일> 복학왕의 사회학, 제목이 너무 재밌어요. 영화 제목 같아요. 지난해 집필하신 논문이면서 올 여름에 나온 따끈따끈한 책 제목이기도 한데요. 왜 청년담론은 수도권 중심인가 말인가, 이런 문제제기를 하신 겁니다. 신선하면서도 날카로운 지적을 하셨고요. 지난해 학계를 뜨겁게 달궜죠. 일부 논문 플랫폼에서 사회학 분야 논문 이용 상위 1%. 정말 대단한 기록이죠. 지방대생의 현실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이런 연구에 임하게 된 계기를 먼저 말씀해주신다면요?

최종렬> 제가 2005년에 대구로 내려가 강의를 했었는데요. 오랫동안 청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을 많이 봤어요. 어느 날 제자가 “선생님 이거 보세요.” 막 이러는 거예요. 뭔가 했더니 ‘복학왕’이라는 웹툰이라면서 대학원 제자가 그러는데 제가 명색이 문화사회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나이가 청년들보다 있다 보니까 안 본다고 자꾸 버티다가 결국 봤는데 첫 페이지를 보고 빵 터졌습니다. 첫 페이지에 대학 플랜카드가 걸려있는데, 예를 들어 “경운기 딴 걸 축하한다, 경축” 정확히는 아닐 수 있는데 그걸 딱 보면서 이게 좀 과장되긴 했어도 지금 지방에 가면 9급 공무원 합격했다면서 플랜카드를 막 걸어놓고 있거든요. 많이 붙은 것도 아니고 몇 명 붙었다. 그 다음에 무슨 시험 최종 붙은 것도 아니에요, 1차 붙었다. 이렇게 캠퍼스에 붙어있던 것들이 떠오르며 ‘이게 과장되긴 했지만 지방대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구나.’ 그래서 제가 막 빠져 들어갔습니다.

최영일> ‘복학왕’에.

최종렬> 네. 웹툰을 막 보면서 열렬한 독자가 됐죠. 자꾸 보다보니까 조금 시들해지잖아요. 그렇게 조금 시들해져있었는데 그 사이에 청년담론이 한국 사회를 엄청나게 휩쓸었습니다. 그런데 사회학자들이 청년을 연구한 것이 아니고, 예를 들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든지 대중적인 접근이 많이 있었는데 비겁하게도 사회학자인 저는 그걸 피하고 안 보려고 했다가 사회학자들이 “청년 세대가 생존주자가 됐다”는 얘기를 하는 순간 제가 실제로 접하고 있는 청년들과 굉장히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연구해봐야겠다 했습니다.

최영일> 너무나 당연한 과정인데 웹툰으로 시작을 하니까 저도 빵 터졌고요. 말씀해주시니까 그러네요.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 분은 소비경제 쪽이셨고. 또 ‘88만 원 세대’ 우석훈 박사도 경제학자고. 왜 사회학자가 청년담론을 도외시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논문과 책을 통해 ‘청년담론들이 수도권 중심이다’ 이런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럼 주로 어떤 담론들이 지방 청년과는 맞지 않는, 서울 중심적 담론이라고 구분할 수 있을까요?

최종렬> 사회학자들도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에요. 청년 담론들을 가만히 보니까 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성공하라는, 자기 자아를 기업가라고 논하라고 했거든요. 기업가로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혁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성공하라는 자기계발 담론이 한동안 사회를 휩쓸었는데요.

최영일> 엄청났죠.

최종렬> 네, 엄청났죠. 그런데 실제로 자기계발을 해보니까 성공하는 사람은 극도의 소수 몇 퍼센트밖에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청년들이 계속 뛰어들긴 하는데 성공한 사람이 적다 보니까 나중에는 ‘성공하자’가 아니라 ‘생존하자’로 바뀌게 됐습니다.

최영일> 그렇죠.

최종렬> 생존주의는 뭐냐면 ‘이번 경쟁에서 떨어지지만 마라’, ‘토너먼트에서 떨어지지만 말자’. 쉽게 말해 폭탄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이번만 살아남자는 거거든요. 그래서 끊임없이 큰 성공을 바라지 않고 떨어지지만 않길 바라는 게 생존주의였는데요. 지역 청년들도 어떻게 보면 유사해요. 제가 연구를 해보니까 서울의 생존주의자들은 ‘경쟁에 뛰어들어 이번 라운드에 떨어지지 말자’ 이건데 지역의 생존주의자들은 ‘경쟁에 들어가지 말자’. 경쟁에 들어 가봐야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경쟁에 들어가지 말고 가족 또는 유사가족 안에서 우리끼리 더불어 살자. 이게 충분히 가능한 삶이거든요.

최영일> 우리끼리 살자.

최종렬> 가족, 유사가족, 끈끈한 정을 가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끼리 뭉쳐 살아가면 지역에선 충분히 가능하거든요. 경쟁에 뛰어들어 실패하면 고통스럽잖아요. 하지만 가족끼리, 유사가족끼리는 치열하게 상대방을 몰아붙이지 않아도 되거든요. 실패했다고 해서 지적하지 않거든요. 지적하면 관계가 파탄 납니다. 그래서 그걸 안 하죠. 그래서 분명히 아픈 데도 불구하고 서로 찌르지 않아요. 서로가 서로에게 낮은 기대를 주고받으면서 끼리끼리 모여 살아가는, 그래서 이 생존주의자들은 경쟁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가족 안에 머물자. 가족 밖은 경쟁하는 곳이고 실패를 안겨주는 곳이고 고통을 안겨주는 곳이기 때문에. 제가 이걸 발견했습니다.

최영일> 요즘 이거랑 비슷한 게 ‘이불 밖은 위험해’, ‘나가지 말자’ 이런 심리들. 방콕족 많이 등장하고 있던데요. 이게 그렇군요. 생각을 못 했었는데 수도권 청년들은 ‘경쟁에 뛰어들되 떨어지지 말자’ 이런 생존주의. 지역에서는 아예 ‘경쟁에 들어가지 말자’, ‘경기장에 들어가지 말자’, ‘맥주 마시면서 관중석에서 구경만 하자.’ 하지만 이것도 굉장히 슬픈 얘긴데요. 이렇게 청년 담론에서 소외된 지방청년들을 위로해주는 듯 하셨는데 마치 반전처럼 지방청년들을 향해 회초리를 내려치고 계십니다. 지방이라는 특수한 구조가 그들을 얽매면서 적당주의에 안주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을 하셨는데요?

최종렬> 사람이 뭐든지 어떤 상황에 적당히 관여하면서 살면 행복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개인들이 적당히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에 관여하며 살아가는 건 저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가치 있는 일을 적당하게 할 수는 없는 거거든요. 그건 정말 몰입해서 추구해야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여기 청년들은 성공도, 생존도 목적이 아니고 행복이거든요. 목적이 가족끼리의 행복인데, 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지역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름의 독톡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데 제가 보니까 적당주의라고 하는 집단 스타일이 있다는 거죠. 개인의 스타일이 아니라.

최영일> 집단의 스타일이다.

최종렬> 네. 적당주의란 뭐냐면 모든 상황을 적당하게 관여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적당히 관여하지 않고 몰입해서 관여하면 성과를 내야 해요. 그런데 성과를 내려고 몰입해봤지만, 우리가 중고등학교 입시교육을 통해 몰입하라고 학생들을 몰아붙이지만 지역에 있는 청년들은 그런 암기식, 오지선다형 문제를 잘 푸는 친구들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어쨌든 그런 방식으로 몰입했지만 결국 성공을 못했기 때문에 가족 밖으로 나와 사회적 인정을 받아본 경험이 거의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몰입을 안 하는 거죠. 적당하게 관여하면, 예를 들어 ‘이번에 나 공무원 시험 볼게.’ 지역에선 공무원만 되면 가족끼리 행복하게 살 수 있거든요. 그런데 공무원 되려면 정말 몰입해서 몇 개월, 몇 년을 파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했다가 실패하면 고통스럽거든요. 그러니까 적당하게 관여한다는 거죠. 그럼 실패도 상처를 안 받아요. 왜? “내가 적당히 해서 그런 거야”, “나 이번에 한 번 시험 삼아 해본 거야.” 이런 식의 적당주의라는 집단 스타일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 있더라는 거죠.

최영일> 묘한 하나의 관습이군요. 집단의 스타일이라고 말씀하셨으니까, 개인의 스타일이면 개성이고 캐릭터가 되는 건데 집단의 스타일이라면 부르디외가 얘기한 ‘아비투스’ 같은 거네요. 사회적 관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어떤 집단 유전자. 경쟁 논리 밖에 머물러 있는 환경이 온전한 몰입을 어렵게 한다. 지금 말씀하신 적당주의죠. 그 외에 또 어떤 것들이 지방청년들을 얽매고 있었던 걸까요?

최종렬> 제가 발견한 것이 ‘집’이라는 메타포인데요. 집이라는 것이 어떤 면에선 가족 밖에 나가 경쟁하지 않도록 아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거죠. 밖에 나가서 조금만 뭐 하다가 실패해서 집에 돌아오면 부모가 감싸주고 안아주고. 그런 것이 지역엔 아직도 살아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적당하게 살면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되는 거고요. 그런데 이걸 뒤집으면 그렇기 때문에 집 밖에 안 나가는 거거든요. 집 밖에 왜 안 나가려고 하냐, 부모들은 굳이 집 밖에 나가지 말라고 그래요. 특히 여학생은 더 심해요. “왜 굳이 서울에 있는 학교를 가냐”, “어딜 가냐”, “지역에 있다가 결혼해서 살아라.” 충분히 가능한 삶이거든요. 그 이유가 뭐냐면 부모 세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국가라는 공적 시스템에 의해 도움을 받고 살아본 체험이 없어요. 본인들이 그저 열심히, 성실하게 일해서 자신의 삶을 꾸려왔기 때문에 아는 거죠, 가족 밖에 나가면 위험하다는 것을. 그래서 빨리 가족을 구성합니다. 남편도, 아내도 둘이서 성실하게 일해서 한 20년, 30년 살아보니 어느 정도 자수성가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내 아이도 밖에 나가면 안 되겠죠. 밖에 나가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지역 청년들을 뒷받침해줄 공적 시스템이 없지 않습니까? 나가면 지방대생이라고 차별만 받죠. 부모님이 아시는 거거든요. 나가지 말고 안에 있어라. 그러면서 모든 삶이 가족으로 시작해서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는 것으로 끝나는, 이런 가족주의 언어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 이것이 언뜻 보면 좋은 것 같지만 양날의 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영일> 그럴 수 있네요. 지금 교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약간 충격인데요. 완전히 다른 시점인 거예요. 일반적으로 청년 담론에서 주거 문제는, 아까 메타포로서 집 말씀하셨지만, 주거를 쉽게 물리적인 공간으로 얘기를 하잖아요. “1인 가구다”, “집 떠나서 청년들이 살아간다”, “주거비용이 경제적으로 부담된다”, “쪽방에서 산다”, “고시원, 고시텔이다”, “집밥을 그리워하며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운다”. 그런데 지방의 주거문제는, 부모님이 거주하는 집에 얹혀사는 청년들이라면 전혀 다른 얘기네요. 서울이 집이 아닌 지방에서 올라온 청년들과 지방에 머물러있는 청년들은 또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자, 뒤집어 보죠. 적당주의와 지금 말씀하신 가족주의가 지역 청년들이 누릴 수 있는 삶의 가치인 것 아닌가, 수도권에서 아등바등 경쟁하는 삶, 생존경쟁을 하는 청년들의 관점에선 부러워할 수도 있는 삶의 가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또 들어요. 성공만을 추구하기보다 일과 삶의 균형을 가지면서 가족을 비롯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것, 도시인들에겐 이게 행복인데. 그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대안적 삶은 아닌가요?

최종렬> 네. 가치 있는 삶입니다. 사실 근대에 와서야 일상에서 소소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이 행복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게 근대가 이룬 위대한 성취거든요. 누구나 무슨 목표를 설정해서 열심히 달려야 가족을 이루고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 엄청나게 노력해야 뭘 얻을 수 있는 사회는 좋은 게 아니죠. 적당하게 살아도 가족을 꾸리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사실 좋은 사회죠. 서울에선 그게 잘 안 된단 말이죠. 그런 점에서 지역에서 그렇게 사는 것도 괜찮지 않냐고 말씀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어느 정도 괜찮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삶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부모 세대가 언제까지 청년들을 안아줄 순 없는 거거든요. 지금까지는 공적 시스템이 청년들을 떠받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열심히 자수성가해서 이들을 받들어준 건데 이 분들도 조금 있으면 나이가 들고 병들고. 또 부동산으로 이룬 자산으로 버텨온 건데 그런 것들이 하락하기 시작하면? 지금 지역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단 말이죠. 그러다 보면 부모님은 누가 돌보겠습니까. 서로 간의 일시적인 연대가 잘 형성되어 있어서 이게 좋은 것 같지만 지속가능하지 않거든요. 지금 벌써 청년들이 지역에서 많이 떠나가고 있어요. 그래서 언뜻 보면 이게 좋은 삶 같지만 지속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20년, 30년 살아가게 되면 ‘우리끼리’, 가족주의, 지역주의, 가족과 지역 밖을 넘어선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결코 이것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영일>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소확행으로 지금 반짝할 수는 있지만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말씀에서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네요. 수요 초대석, 오늘은 ‘복학왕의 사회학’의 저자 계명대 최종렬 교수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타개해야 할 텐데 청년 개개인의 힘으로는 좀 불가능해보입니다. 앞에서 문제제기를 다양하게 해주셨으니까 이제 교수님께 좀 부담을 드릴게요. 어디서 해법을 찾아야 합니까?

최종렬> 저도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제가 총 29명을 인터뷰했는데요. 제일 쉬운 방법으로, 거기서 나온 문제점을 추려서 외부의 이론을 끌어다가 답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29명의 이야기 속에서 방법을 찾고 싶었어요. 소수자라는 게 권력이 없어서 소수자가 아니고, 경제적인 부가 없어 소수자가 아니고,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게 소수자거든요, 제가 볼 때는. 그래서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찾아낸 게 뭐였냐면, 부모 세대도 그렇고 졸업생도 그렇고 재학생도 그런데 뭔가 꿈틀거리는 감각과 감성이 있어요. 사실 감각과 감성이라는 건 모든 개인성의 뿌리거든요. 그런데 부모 세대는 너무 일찍이 싹이 짓밟혔어요. 여성분들은 “여자가 뭘” 이런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살아왔고, 장남은 장남 나름대로 무거운 짐을 짊고 살아왔고, 차남은 또 나름대로 집안의 도움을 못 받으면서 자수성가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까 자기의 감성과 감각을 깨워보지도 못하고 바로 가족으로, 새로운 가족을 형성해 살아가는 식으로 살아왔거든요. 그런데 세대가 내려올수록 감성과 감각의 추구, 요즘 말로 하면 사치에 대한 추구, 새로운 체험에 대한 추구 그런 것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살려줄 수 있는, 쉽게 말하면 개인주의를 좀 깨워야 되는데 사실 개인의 가장 근본적인 물질적 토대는 몸이거든요. 그래서 몸을 통해 감각, 감성을 키워줄 수 있는 교육을 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감각과 감성으로만 나가면 먹방이라든지 잠깐 하는 감각과 감성이 되는데 그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나의 개인성이 무엇인지 이런 걸 깨우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좋은 삶이 무엇인지’,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청년들이 질문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해요. 그런데 지금까지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을 교육받지 않았거든요.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가 질문하려면 질문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이 있어야 돼요. 문화적 역량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문화사회학자기 때문에 이런 용어를 썼는데,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줘야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휘잡고 있는 이야기는 경제 이야기거든요. ‘단기 수익을 내라’는 방식으로 자꾸 사람들을 압박하는 경제의 언어.

최영일> 재테크, 재테크 그러죠,

최종렬> 네. 그리고 ‘모든 책임은 다 너한테 있어’ 이런 심리주의 언어. 이런 것들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아이들은 가족주의로 후퇴해있단 말이죠. 그래서 이런 기존의 언어, 이야기 가지고서는 우리의 삶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좋은 삶을 끌어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제가 사회학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사회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사실 근대 사회를 열어 놓은 학문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선 더더욱 중요합니다. 지금은 청년문제를 정책적인 측면에서만 다루지만, 물론 앞으로 국가가 할 겁니다. 왜? 청년들이 점점 줄어드는데 국가가 안 나서겠어요? 재생산의 위기에 처하면 국가는 막 나섭니다. 벌써 지역의 청년들을 지원하는 많은 정책들이 행해지고 있거든요. 저는 그건 그거대로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문화적인 역량,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상징적 힘을 키워줄 수 있는 이야기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영일> 아주 중요한 이야기, 심오한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원초적으로 감각과 감성을 일깨워야 하고, 그것이 성찰로 나아가야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객관화하고 창의성도 보태면서 이야기하는 힘을 만들어야 한다. 그럼 지역 청년들을 둘러싼 구조적인 문제들을 한 번 들여다보죠. 먼저 지자체에선 지역 청년들의 학업이나 주거, 취업에 대한 지원을, 아까 말씀하신대로 공적 영역에서 대대적인 지원을 시작했잖아요. 물론 저희가 교육방송이다 보니까 점점 지방의 대학들이 위험해지겠다는 기류가 감지됩니다만, 지역 청년들이 누릴 수 있는 메리트도 있는 게 사실인데요. 수도권 청년들과는 다르게. 지자체의 청년 지원, 아까 그건 그거대로 진행됐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이걸 좀 따로 띄어서 보면 어떻게 보십니까?

최종렬> 아이들이 집 밖으로 안 나오는 것은 나가면 위험하기 때문이거든요. 지금 청년들 18, 19살만 되면 독립하고 싶어 합니다. 언제까지 부모가 끼고 살 수는 없는 거거든요.

최영일> 그렇죠.

최종렬> 저희 세대와는 다릅니다. 그러려면 밖에서 독립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줘야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게 집입니다. 주거. 지역에서는 좀 낫다고 하지만 여전히 지역에서도 청년들이 독립해서 살 수 있는 주거 독립의 기반이 굉장히 약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청년들이 독립하지 못하고, ‘이왕 독립할 거면 서울 가지’ 이러다 보니까 지역에 청년들이 점점 줄어들고요. 지방자치단체들은 그거에 혈안이 돼서 청년들이 지역 내에서 독립할 수 있도록 많은 정책을 취하고 있어요. 주거지를 마련해준다든지. 저는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이런 건 하지 말래도 합니다. 왜냐하면 지역 자치의 재생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청년들이 다 떠나가는 사회에서 지역이 재생산될 수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국가든 지방자치단체든 청년들을 지원하는 정책을 계속 취할 겁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그건 그거대로 가면 되고, 하지만 그것만 갖곤 안 된다. 제가 적당주의라는 집단 스타일도 얘기했었고 우리 사회가 청년들에게 주입시키는 경제주의적, 심리주의적 언어도 얘기했었는데요. 결국 청년들이 쓸 수 있는 언어가 한정되어 있다 보면, 아무리 돈을 퍼부어도 아이들이 그걸 활용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최영일> 그게 어찌 보면 이야기, 지성, 지식 여러 가지 형태일 텐데요. 이거 하나 여쭤볼게요. 대학의 위기, 특히 지방대학의 위기 잠깐 언급 드렸는데요. 지방대 교수로 계시기도 하잖아요, 지역 청년에 대해서 지방의 대학들은 자기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최종렬> 현재 모든 대학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학령인구가 줄기 때문에 이렇게 가다간 우리 대학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최영일> 문을 닫겠다.

최종렬> 네. 이런 것이 가장 큰 관심사고요. 지역의 대학들이 한동안 등록금을 동결시켰었는데, 이게 취지는 좋지만 실제로 결과를 보니까 물가는 계속 올라가는 데 등록금은 동결되어 있었단 말이죠. 그러다 보니까 재정이 자꾸 부족해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국가에 더 기댑니다. 그럼 국가는 대학을 어떻게 조절하냐, 학령인구가 줄기 때문에 우리 지표에 맞춰라.

최영일> 통폐합을 하든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요.

최종렬> 국가가 제시한 지표 중 가장 중요한 지표가 취업률이었거든요, 지금까지. 지난 정권부터 쭉 나온 게 취업 문제, 지금도 일자리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학에 떠넘긴 셈이죠. 국가가 취업률을 지표로 들이대니까 대학들은 당장 취업할 수 있는 학과, 쉽게 말해 단기적 이득을 내도록 학과를 일개 기업의 부서 같은 걸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까 당장 취업 효과를 낼 수 없는 학과들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줄어나가고 있고. 이렇게 가다 보면 대학이라는 게 기업에 단기적으로 취업할 수 있는 공부만 시키는 취업 훈련소가 되어버린다는 거죠. 그런데 지역의 대학들은 재정 지원에 목말라있다 보니까 그 지표에 맞추기 위해 그렇게 하게 되고요.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님에도 불구하고요. 이렇게 대학이 제대로 된 역할을 못하면서 이대로 가다간 정말 희망이 없다. 그래서 제가 ‘지방 청년들은 도대체 어디서 희망을 찾아야 되나’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가족끼리는 훈장님도 자기 아들은 못 가르친다는 말이 있죠.

최영일> 그런 속담이 있죠.

최종렬> 서로 간에 정서적으로 동일시되기 때문에 아픈 얘기를 할 수가 없거든요. 그다음에 기업은 청년들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당장 어떻게 활용해서 단기이윤을 낼까, 이거에 관심 있거든요.

최영일> 자원이죠, 인적 자원. 투자 대비 효율, 가성비.

최종렬> 국가는 그럼 무슨 관심이 있느냐, 재생산에만 관심이 있다는 거죠. 옛날에는 청년들에게 좋은 삶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질문을 던지게 해주는 게 그나마 대학이었는데 지금 대학이 그런 힘을 자꾸 상실해나가고 있어서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안으로 미학적 폴리스라는 걸 제시했는데요. 폴리스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 앞에 사람으로 현상해야 한다는 거거든요. 사람이 사람 앞에 동물로 현상하면, 우리 사회에 문제가 되는 갑질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인간 앞에 인간으로 현상하지 못하고 동물로 현상하고 있거든요, 지금. 이건 구조적 문제기도 하지만 청년들의 문화적 역량이 떨어져서 그런 거기도 해요. 그럼 남 앞에 인간으로 현상하는 것도 훈련 받아야 합니다. 의사가 되려면 의사를 만들어줄 의사 이야기를 공부해야 돼요. 쉽게 말하면 의학 담론을 공부하고 익히고 실천해야 의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 것처럼 청년들이 좋은 삶을 살게 하려면 청년들에게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가르쳐야 됩니다, 대학에서. 단기 취업이라든지 가족주의라든지 이런 거 말고요. 그래서 조금 이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이 책에서 제시한 것은 “이것은 정책이라든지 단기 처방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인 전환, 성찰, 새로운 이야기가 도입되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거다.”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제가 사회학자이기도 하지만, 사회학 이야기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학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성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절실한 마음을 갖고 이번 책도 대중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상당히 노력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이런 새로운 이야기의 도입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최영일> 제목은 ‘복학왕의 사회학’, 웹툰을 보시고 빵 터져서 몰입하다가 이 글을 쓰신 건데, 저는 지금 너무너무 이해가 되면서 절감이 됩니다. 어찌 보면 20세기 초반, 일제강점기에 농촌계몽운동, 브나로드운동이 벌어지잖아요. 지성인들이 막 농촌으로 가서 야학도 하고 같이 어울려서 농사도 짓고 공부도 하고 그런단 말이에요. 지금 말씀하신 게 필요한데, 만약 지금 이러한 미학적 폴리스에 지방대학이 기여를 하고, 그들의 가족주의가 적당한 플랫폼이 되어주면서 새로운 세계로 나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까 말씀하신 거에서 달팽이집이 생각나요. 외부에 삭풍이 몰아치니까 다 집안으로 움츠러들었구나. 그런데 이들을 이야기의 힘으로 끌어낸다면 다른 세상을 좀 꿈꿀 수 있지 않을까. 그 이야기를 최 교수님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이 시스템이나 구조를 넘어선다는 게 쉽지는 않죠. 사회학에서 구조의 힘, 그걸 고전 사회학자들부터 많이 얘기해왔는데요. 그럼에도 가족주의와 지역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럼 지역 청년 스스로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뭘까요?

최종렬> 집에서 청년들을 끌어내기 위한 정책들을 국가가 취하고 있고 앞으로 더 많이 취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같은 경우도 청년 수당 같은 것 주지 않습니까. 지역에서도 그걸 많이 주고 주거도 만들어주고 할 텐데, 집 밖으로 끌고 나왔는데 계속 가족주의 언어로 살고 있고, 경제주의 언어로 살고 있고, 심리주의 언어로 ‘모든 건 니 책임이야’ 이렇다면 그건 집 안에 있든 집 밖에 있든 아무런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최영일> 물리적 주거가 중요하지 않다.

최종렬> 네. 새로운 이야기가 들어와야 한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게 굉장히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예를 들어 조선 500년을 지배한 건 성리학의 이야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야기의 힘이라는 건 그만큼 중요한 거거든요. 이것이 무너지기 위해선 새로운 이야기가 들어와야 합니다. 기독교 이야기도 들어오고 사회주의 이야기도 들어오고 자유주의 이야기도 들어오고. 또 온갖 이야기들이 들어왔을 땐 2, 3명 소규모로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우리 사회가 변하려면 지금 단기적인 성과를 내라고 하는 경제주의 언어에 빌붙은 모든 이야기들, 이 이야기들을 뒤집어보고 비판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학적 이야기를 가르쳐야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영일> 새로운 네트워크가 생겨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교수님, ‘복학왕의 사회학’에 대해 “상처 좀 받으라고 썼다” 이런 얘기도 하신 바가 있는데.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방 청년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 관심이 있어야 현미경도 들이대고 돋보기도 들이대고 연구를 하시는 거죠. 논문과 책을 통해 지역 청년들에게 정말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 끝으로 전해주신다면요?
 
최종렬> 제가 만약 이 연구를 어디서 발주 받아서 단기 연구로 성과 냈다고 한다면 욕먹어도 쌉니다. 감히 이렇게 심하게 지역 청년들에게 얘기하다니. 하지만 제가 2005년에 지방에 가서 제 나름대로 거기서 십몇 년의 인생을 바쳤거든요. 연구는 1, 2년 집중적으로 했지만 사실상 13, 14년을 참여 관찰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아픈 애기를. 부모는 말 못한다고 했죠. 친구도 말 못합니다. 그럼 누가 하겠어요. 선생으로서 못하는 애들을 잘한다고 박수쳐주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나도 기대를 낮춰야 되는 건가?’, ‘나도 쟤들처럼 적당히 가르쳐야 되는 건가?’ 사실 지역에 가면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왜냐하면 그 분들도 다 좌절을 겪었어요. 몰입해서 열심히 하고 싶은데 학생들이 다 적당히, 적당히 하니까 어느 순간 자기도 적당히 하게 되는. 그렇게 되면서 학문적인 부분에 있어 학자들끼리 모일 때는 몰입하고 청년들에게는 적당히 하고, 이런 안타까운 현실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 수 있겠지만 그래도 강하게 한 번 이야기를 해본 거죠. 십몇 년 간 참여 관찰했기 때문에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야기라는 것은 현실을 초월하는 힘입니다, 상징의 힘입니다. 청년들이 어떤 삶이 가치 있는지 질문을 던지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최영일> 지금 교수님의 눈에서 결기가 느껴집니다. 청취자 김경숙 님, 적당주의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지역에서도 청년들이 몰입하고 꿈꿀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으면 좋겠어요. 7097님, 괜히 수도권 공화국이라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모든 물자, 인프라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으니 지방에 있는 청년들은 자연스럽게 소외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계속 이탈하거나 안주하는 것이겠죠. 이런 말씀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최 교수님의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수도권, 대도시에 살고 있어도 별 다르지 않은 적당주의와 가족주의에 휩싸여있는 경우도 있고요. 지방에 가있어도 수도권 청년 못지않은 도전의식을 발휘하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물리적인 공간의 이야기라기 보단 소외되어 있는 우리 개개인이 이야기의 힘으로 뭉쳐야 할 때가 된 건 아닌가 하는 메시지를 저는 전달받았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서 정리하겠습니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최종렬> 네, 감사합니다.

최영일> 지금까지 계명대학교 사회학과의 최종렬 교수님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 EBS NEWS